텔레그램은 4월 텔레그램 오픈 네크워크인 TON (Telegram Open Network)을 통해 중앙 아프리카 국가들 간 통합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참여하며 "텔레그램 메신저를 통한 암호화폐 P2P 거래를 구상 중이다"란 계획을 밝혔다. 해당 계획이 현실화된 것이다.
높은 인플레에 기인한 경제 위기로 인해 전세계가 화폐의 가치에 대해 반문할 시점, 텔레그램은 야심찬 행보를 보였다.
전세계가 높은 인플레에 허덕였다. 높은 인플레이션은 달리 말하면 법정화폐 가치의 하락을 뜻했다. 여러 국가들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낮아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안전자산'인 달러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익명성과 편의성에 기대어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는 현상을 보였다. 특히 전시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에서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급증했다. 러시아 서비스에 대한 스테이블 코인의 거래량 비중은 지난 1월 42%에서 3월 67%로 증가했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 야심 찬 탈달러 선언과 러시아의 딜레마, 그 끝은 비트코인
9월 러시아는 '탈달러'를 외치며 국제 무역에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크립토 무역'을 선언, 'BRICS+'의 새로운 기축통화 설립을 예고한 상태이다.
러시아는 자국 내 스테이블코인의 막대한 유입과 유통을 허락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를 비롯해 전세계에 유통된 '메이저 스테이블코인'의 또다른 이름은 달러이자 미국 국채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 76%를 차지하는 테더(USDT)와 USDC는 모두 준비금으로 80%가 넘는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에 스테이블코인 유입은 달러와 미국 국채의 유입을 뜻한다. 즉, 크립토 무역을 통해 미국과 달러 패권에 맞설 의지를 나타낸 러시아의 스테이블코인 금지는 당연한 수순이다.
러시아가 스테이블코인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바로 크립토 무역에 비트코인(BTC)을 활용하는 것이다. 비트코인은 비트코인의 백서가 명시한 대로 한정된 공급량과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간 거래를 보증할 수단이자 자산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비트코인 사용은 발행 주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산을 통해 국제 무역을 실행함과 동시에 그 자체로 달러 헤게모니 탈피를 뜻할 수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비트코인의 높은 수요는 스테이블코인이 순식간에 매도되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기본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을 기축 통화로 사용,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암호화폐 거래를 진행한다. 이런 사실에 따라 비트코인이 큰 수요를 보이는 순간, 거래소에 배치된 스테이블코인은 순식간에 비트코인 구매를 위해 사용돼 사라지게 된다. 러시아는 비트코인을 자국 내 유통된 스테이블코인, 즉 달러와 미국 국채를 날려버릴 수단으로 사용할 강한 동기를 갖고 있다.
# 크립토 무역 발표 후 때마침 등장한 텔레그램 P2P 거래소, 최대 금융망을 꿈꾸다
러시아가 크립토 무역을 시행함에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텔레그램일 수 있다.
텔레그램이 10월 P2P 거래소로 변모했다.
이번 달 초, 텔레그램은 미국 달러(USD), 러시아 루블(RUB), 우크라이나 그리브냐(UAH), 벨라루시 루블(BYR), 카자흐스탄 텡게(KZT)와 암호화폐 거래 기능과 암호화폐 간 거래 기능을 출시하며 본격적으로 P2P 거래소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 발표했다.
텔레그램은 무엇을 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러시아는 크립토 무역을 관장할 주요 주체로 중앙은행과 모스크바 증권 거래소를 지목했다. 철저히 국가 주도의, 국가를 통한 크립토 무역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은 이미 달러 인출 상한제 등 전쟁으로 인한 '뱅크런' 사태를 경험했다. 러시아 국민들이 자산을 보호할 수단은 은행이 아닌, 익명성과 편의성을 갖춘 스마트폰 속 텔레그램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약 7억 명의 사용자와 텔레그램이 가진 익명성은 크립토 무역의 영향권에 속한 국민들이 텔레그램을 사용할 주된 이점이 된다.
많은 이들은 텔레그램과 연관된 수많은 범죄를 지목하며 반문할 수도 있다. 텔레그램의 익명성은 실제로 많은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류가 문명의 발전을 거듭할 때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은, 인류가 기술이 수반한 위험성보다는 편의성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텔레그램이 노린 것은 정부와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편의성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일 것이다.
러시아 최대 금융망은 텔레그램 TON이 될 수 있다.
권승원 기자 ksw@